보은숲밭의 냇물에서 발견한 산돌배나무 열매


지혜를 새긴 나무, ‘산돌배나무’

충청북도 보은군 숲밭에는 투박하고 작지만 배처럼 생긴 열매를 맺는 산돌배나무가 자라고 있습니다. 겉모습은 평범해 보여도, 이 나무는 우리나라의 기록문화와 출판문화가 대중화되던 시기(고려와 조선 시대)에 지혜를 나누는 나무로서 놀라운 역할을 했습니다.

합천 해인사의 팔만대장경 모습(장경각 내부)

나무가 책이 되다

옛날에는 책을 찍기 위해 먼저 나무판(목판)을 만들어야 했습니다. 이 나무판 위에 글자를 새기고 잉크를 바른 뒤 종이에 찍는 방식이었지요. 옛 문헌에 따르면, 이 나무판을 만들 때에는 특히 배나무, 돌배나무(돌배나무·산돌배 포함), 산벚나무, 박달나무, 단풍나무 등 활엽수가 적합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컨대, 우리나라 대표적 목판문화유산인 팔만대장경 판목에는 돌배나무, 산벚나무 등이 재료로 사용되었다는 자료가 있습니다. 배나무나 돌배나무는 목재가 단단하고 결이 곱기 때문에 뒤틀리거나 갈라지기 어려워, 오래도록 보관해야 하는 판각의 재료로 매우 알맞았던 것이지요.

보은과 ‘출판 나무’의 만남

보은군에는 오래된 사찰인 법주사가 있습니다. 이 사찰은 고려·조선 시대부터 중요한 사찰로서 건립되고 중창된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우리나라의 문화재로도 지정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기록과 불교문화가 풍성했던 보은 지역에서, 목판인쇄 재료로서의 활엽수(예컨대 산돌배나무) 존재는 의미가 있습니다. 나무가 단지 숲의 나무가 아니라, 지식을 나누고 기록을 남기는 도구로 쓰였던 나무였기 때문입니다.

이에 따라 보은숲밭의 산돌배나무는 단순히 ‘숲속의 나무’가 아니라, ‘출판과 기록의 역사’를 떠올리게 하는 상징 나무가 될 수 있습니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산돌배나무(금산군)


왜 소나무가 아니라 활엽수인가?

사람들이 흔히 나무 하면 소나무를 떠올리지만, 목판 제작에는 소나무보다 오히려 활엽수가 더 많이 쓰였습니다. 아래 이유가 있습니다. 활엽수는 결이 고르고 무늬가 균일해 글자나 그림이 잘 새겨졌습니다.

그에 반해 소나무는 송진이 많거나 뒤틀리기 쉬워 판각 재료로는 덜 적합했습니다.

돌배나무·산돌배나무처럼 ‘잡목’이라 불리는 나무이지만, 바로 그 ‘잡히는 나무’가 일상 가까이 있었고, 나무판 재료로 접근성이 좋았습니다. 따라서 보은 지역의 산돌배나무는 ‘기록을 담는 나무’로서 지역성과 역사성을 함께 지닙니다.

“지혜를 새긴 나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이유

목판 인쇄가 활발해지면서 지식이 소수 엘리트층의 전유물이 아니라 더 넓은 계층으로 퍼질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인쇄문화의 기반에는 목판을 만들 나무가 필수였고, 돌배나무·산돌배나무는 그 재료 중 하나였습니다. 보은숲밭의 산돌배나무는 우리의 역사 속 ‘지식을 나누는 상징적 존재’로서 살아 있습니다.

그래서 보은숲밭의 산돌배나무는 단순히 한 그루의 나무가 아니라 우리의 출판·기록문화, 지식을 나누는 역사의 흐름, 숲과 사람이 만나 이룬 문화적 연결고리, 이 모두를 담고 있는 상징 나무입니다. 아이들과 함께 이 나무 앞에 서서 “우리는 어떤 지혜를 나누고 기록할까?” 하고 이야기해 보는 시간이 되면 좋겠습니다.